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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간직

[김복동 선생님 시민장 조문]



일본군성노예 문제 해결을 위해 힘써와 주시고, 그 문제의 피해자이자 영웅이신 김복동 선생님께서 지난 1월 28일날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평소에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아 이번에 선생님을 추모하고자 친구와 함께 시민장에 조문을 드리러 갔어요. 


여성인권 운동가이신 김복동 선생님은 

영화 [아이캔스피크]의 나문희 배우님이 연기하신 실존 인물이심.




사실 장례식장에 조문가는 것이 이번이 아예 처음이라 조문 예의도 몰라 정말 걱정했었어요. 친구 한 명과 같이 갔었는데 그 친구도 그리 익숙한 장소는 아닌지라... 가는 길에 국화꽃을 사가야하나도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거기에 국화꽃이 구비되어 있더라고요. 다음에 조문을 갈 때는 (물론 다음이 일어나기 전에 사과를 받아내야한다) 보다 덜 어색해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복동 선생님 시민장은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진행했는데 제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대중교통으로 1시간정도 걸리는 거리라 학교가 끝나자마자 바로 친구랑 만나서 출발했어요. 목요일날(01.31) 갔었는데 마음만으로는 내일 있을 영결식까지 가고 싶었어요. 다만 금요일이 바로 종업/졸업식이어서...ㅠㅠㅠ 





 약 오후 4시 경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도착했어요. 저희는 서울대입구역에서 750A 버스를 타고 한 번에 그냥 직행으로 갔는데, 2호선을 이용해서도 갈 수 있으니 참고하시기를! 세브란스 병원은 처음 가봤는데 굉장히 넓더라고요. 그래도 잘 안내되어있어서 헤메지 않고 찾아갈 수 있었어요. 횡단보도 건너서 보면 장례식하는 곳으로 안내표지판이 있었어요. 





사실 이걸 보기 전까지는 김복동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아이캔스피크"라는 영화로 알려지기도 하셨고 수요일 집회마다 나오신 걸로 알고 있어서 기사로만 봤을 땐 그냥 제 3자처럼 멀찍히 서 있는 기분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특실 1 故 김복동 님] 이라고 써진 걸 보니까 새삼 실감이 났어요.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고 해야하나... 그냥 '아, 정말 돌아가셨구나' 하는 허망한 마음이 가장 크게 들었던 것 같습니다.





특실 1 로 들어가는 입구엔 화환들이 가득 줄을 이루며 서 있었고, 안쪽으로 들어가자마자 보인게 바로 이 할매나비들이었어요. 세월호 참사 때가 생각나기도 했고 굉장히 제 스스로가 겸허해졌습니다. 저하고 친구도 당연히 썼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할매나비도 있었어요. 수요집회에서 눈 마주치며 웃어주셨던 김복동 선생님. ← 정확하진 않지만 이런 내용이었는데 가슴이 저릿해왔습니다. 저는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누구보다 '김복동' 스러웠던 분. 편히 쉬세요. 저희가 이어받겠습니다." 라고 남겼고, 친구는 "선생님의 첫 용기 모습을 기억합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남겼어요. 여기서 '내가 기억하는 여성 인권 운동가 김복동' 이라고 쓰여진 것도 정말 뭔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전해져왔습니다.





 교복을 입고(제일 단정한 복장이라고 생각해서 교복을 입고 갔습니다.) 개인 신분으로 가니 거기에 계셨던 분이 애들과 나누라며 조문보를 굉장히 많이 챙겨주셨습니다. 50장이나 됐었는데 아직까지도 남아있어요. 더 이상 재발주될 일이 없는 조문보고, '김복동' 선생님의 생애가 짧게나마 담겨있는데 그걸 한 번 읽고 버려버릴 애들에게 주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 생각되었거든요. 그래서 같이 페미니즘 동아리 하는 애들에게 원하는 사람 한정에서 주고, 주변 친구들에게 원하는 애들만 주기로 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 조문보 보면서 정말 착잡하면서도 제 자신이 쑥스러운 마음까지 들었거든요.


 조문 드리는 공간은 따로 찍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제가 조문 예의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 공간까지 찍는 건 정말 무례를 범하는 것 같았어요. 국화꽃 줄기의 그 매끄러운 감촉과, 흰 꽃잎, 그리고 손바닥과 무릎에 닿던 장판의 감촉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친구는 손까지 떨었더라고요. 저는 그 때까지도 비현실적이라는 감각이 사라지지 않아서 얼떨떨한 기분으로 마무리 지었는데 후반부에서 기어코 터지더라고요. 




차례대로 나와 친구다.



조문을 끝내고 나니 안쪽에서 식사할 거리를 주셨습니다. 맛있게 먹었어요. 아..정말, 왜 그 때 눈물이 터졌는지. 장례식장에서 우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들었는데... 처음엔 친구가 육개장을 먹다 말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그냥 아..슬프다. 이런 심정으로 밥을 먹고 있었는데 조문보를 꺼내 읽다가 마지막 글에서 눈물이 흘렀어요. 착잡한 마음으로 있다가 눈물까지 흐르니까 정말 속상하고 슬펐습니다. 동시에 일본 정부를 향한 분노도 느꼈습니다. 더욱 열심히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운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동적인 것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까, 제가 직접 능동적으로 운동해야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친구랑 수요집회에도 참가하기로 했어요. 말로만 들어왔지 수요집회를 직접 참가해본 적은 없었거든요. 


시민장에 참여해주신 분들 중에서 학생 분들은 굉장히 적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시민장 마지막 날에 가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그 사실만으로도 굉장히 착잡해져왔습니다. 저와 친구, 그리고 저희가 갈 때쯤 오신 고등학생 3분 빼고는 다 어른분들이셨어요. 시민장 내가 적적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많이들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하는 일이라면

포기하지 않았던 한 영웅의 발걸음이 

결실로 이어지기를,

무엇보다 우리 공동체의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믿고 기원한다.






현수막에 걸려있던 문구도 가슴에 깊숙이 박혔습니다. 친구와 밥을 먹으면서 페미니즘 동아리에 대한 얘기를 나눴는데 제가 페미니즘 동아리 이름으로 '나비'가 어떠냐고 추천했거든요. 그런데 처음에는 너무 여성성이 강조되는 게 아니냐고 했다가 이 현수막을 보고는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하는 친구가 인상깊었습니다. 말그대로 인류의 자유를 꿈꾸는 선생님 같았습니다. 





구석진 곳에 들어가면 김복동 선생님께서 직접 그리신 그림들이 있었어요. 꽤 구석진 곳(현수막 바로 아래)에 있어서 처음에는 몰랐는데 다행히도 친구가 발견해서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저는 이게 정말 마음에 들고, 제일 슬펐던 것 같아요. 그저 국가 대 국가, 가 아닌 여성 인권의 향상을 위해 한국군이 가해자였던 베트남 위안부를 위해서도 응원의 손길을 건내주신 분. 말 그대로 제가 지향하는 사람 그 자체였던 것 같아요. 실제로 행동하고, 노력하고, 평화를 지향하는 사람. '영웅'이라는 수식어가 그 누구보다 어울리신 분이셨습니다.



이번 시민장을 통해 보다 능동적이고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절대 영웅들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기를. 또한 수요집회나 그런 활동에도 성실히 참여하고 싶고요. 훌륭한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의 한 장면으로 스러져 잊혀지신 분들이 너무나도 많다고 느꼈습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곡히 기원합니다. 정의가 이기는 날이 오기를.






(+) 세월호 참사 때 배경사진으로 지정해두던 사진이 무심결에 떠올랐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부디 일본군성노예문제뿐만이 아니라 한국군성노예 (베트남) 문제도 해결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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