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차별은 언제나 그렇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차별은 차별로 인해 불이익을 입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p.7)
설령 장애인이 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생활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장애인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는 건 이상하다. 장애인이 희망을 가져야 할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변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p.10)
이런 호의성(시혜성) 자선사업이나 정책은 그저 선한 행동이 아니다. 내가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주고 말고를 결정할 수 있는, 통제권이 온전히 나에게 있는 일종의 권력행위이다.(p.27)
여기서 초점은 서로 다른 종류의 삶을 만드는 이 구조적 불평등이다. (p.33)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이 과거에 비해 얼마나 개선되었는가에 대한 설문에, 백인은 "많이 개선되었다"고 하고, 흑인은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고 응답하는 경향이 꾸준히 나타난다. (p.35)
기존에 특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사회가 평등해지는 것이 손실로 느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평등을 제로섬 게임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상대의 이익이 곧 나의 손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 평등을 총량이 정해진 권리에 대한 경쟁이라고 여긴다면, 누군가의 평등이 나의 불평등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p.35)
인간의 마음은 범주의 도움을 받아야 사고할 수 있다. ... 그래야 질서 있는 생활이 가능하다. (p.42) / 편견의 본질 - 고든 올포트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한 결과, 사회가 부여한 낙인을 자신 안에 내면화하고, 스스로를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개인적인 수준에 머무르지 않는다. 굳이 타인들이 노골적으로 차별하지 않아도 본인들이 소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차별적인 구조가 유지된다. 차별을 받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 부족하고 열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저항을 하지도 않는다. (p.66)
노동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사회 전반의 성차별 의식 그리고 정치적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 여성이 많은 직업은 여성이 많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노동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현상이다. (p.74)
인생에서 중요한 일일수록 그 선택은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니, 최대한 안전한 결과를 얻기 위해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p.75)
교육이란 본래 모든 사람에게 성장의 기회를 주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 본질적인 기능이 왜곡되어 누군가에게는 우월감을, 누군가에게는 열등감을 심어주는 체제가 되었다. (p.78)
사람들은 자신이 동일시하는 집단을 우월하게 느끼게 하는 농담, 달리 말하면 자신이 동일시하지 않는 집단을 깎아내리는 농담을 즐긴다. 만일 상대 집단에 감정이입이 일어나면 그 농담은 더이상 재미있지 않다. 상대를 나와 관계없는 사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겨야 농담을 즐길 수 있다. (p.87)
'김치녀'는 '사치를 부리며 남성에게 피해를 끼치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말은 여성이 남성에게 보여야 하는 '바른' 행동에서 어긋나 있다는 평가를 포함한다. 즉 여성에게 기대되는 행동, 말하자면 조신하고 검소한 모습을 보여야 정상이라는 억압적인 역할 규범이 부여된 언어이다. '한남충'의 경우, 여성이 남성에게 특정한 역할 규범을 요구하는 의미로 읽히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여성의 입장에서 '나도 당신을 조롱할 수 있다'는 호명 권력을 사용하는 현상으로 읽힌다.
따라서 '김치녀'와 '한남충' 논쟁은 단순한 언어 사용의 문제를 넘어서는, 더욱 심층적인 사회적 성차별 구조의 지각 변동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역사적으로 억압되었던 집단이 평등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이런 현상은 반복된다. 기존의 억압을 유지하기 위한 비하성 언어와 기존의 권력에 맞서기 위해 등장한 비하성 언어가 대립하는 것이다. '둘 다 잘못'이라는 양비론으로 접근해서는 이 난제를 풀 수가 없다. 불평등을 철폐하려는 힘과 유지하려는 힘 사이의 첨예한 긴장 속에서 사회가 평드으이 방향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명확한 관점을 가져야 한다. (p. 97)
그런데 노키즈존, 노스쿨존, 노장애인존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까? '진상' 손님이 성인 남성이라면 과연 '성인 남성 금지'라는 표지판을 내세울까? 이런 '진상' 손님이 인근의 대기업 직원이라면 어떨까? 'OO 기업 금지'라며 모든 사원의 입장을 거부할까? 이런 상황은 쉽게 상상되지 않는다. 반면 외국인에 대해서는 '그냥' 싫다는 이유만으로도 '내국인 전용'이라고 붙일 수 있다. 왜 어떤 집단은 특별히 자롬ㅅ이 없어도 거부되는데, 어떤 집단은 개별적으로만 문제삼고 집단으로는 문제삼지 않을까? (p.123)
"차별은 단순히 지폐나 동전이나, 햄버거나, 영화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인종이나 피부색을 이유로 그를 공공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가 당연히 느낄 모멸감, 좌절감, 수치심의 문제이다." (p.133)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 권력이다. (p.142)
말 자체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주체 사이의 권력관계가 그 말의 의미와 결과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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