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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독후감

[독후감] 이윤재: 우리말 우리역사 보급의 거목

이윤재: 우리말 우리역사 보급의 거목

유시연

 

 최근에 본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것이 바로 영화 「말모이」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을 다룬 영화였는데, 배우들의 연기도 물론 좋았지만 근·현대에서 우리말을 지키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이 영화화된 것을 본 것이 처음이라 유독 생각이 많이 나는 것 같다. 이번 역사 독후감으로 역사시간에 중요한 인물이라며 잠깐 언급이 나왔던 인물 ‘배설’에 관한 책을 읽을까 고민했지만 이내 조선어, 한글을 지키려고 했던 이윤재 선생을 주제로 한 책을 보자마자 이 책을 고르게 되었다. 이후 영화 말모이에 이윤재 선생의 역할이 있을까 찾아보았지만 아쉽게도 없었다.

 

 이윤재 선생은 1888년 경남 김해군에서 태어났으며, 정말 평생을 국어와 그 보존, 더 나아가 국가의 자주독립까지 손을 뻗은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언어(한자와 한글)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으며, 그 외에도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언어능력은 후에 한자로만 적힌 조선왕조실록을 정독할 수 있어 보다 자세한 역사를 알 수 있게끔 했다. 20여 년의 공부를 마친 후 이윤재 선생은 교편에 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일제의 감시 하에 있었던 터라 힘들었지만 그는 한글의 사용만을 주장하였으며, ‘나는 milk와 밥을 먹었다.’처럼 외국어와 한글을 같이 쓰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행위라고 하였다. 특히 이윤재 선생의 학생 중 한명이 6월을 ‘육ゲ월’이라고 쓴 뒤(ゲ는 일본어로 ‘게’라고 읽는다), ‘육개월’이라고 읽어 눈물을 흘리셨던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이 얼마나 깊숙이 침투 했었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수양동우회와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 일원으로 행동하며 계속해서 민족운동, 독립운동을 진행해 나갔다. 결국 두 번 감옥에 드나들었고,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세 번째 복역 중에 옥사하였다. 첫 번째는 3·1운동을 빌미로, 두 번째는 수양동우회를 빌미로, 세 번째는 조선어학회를 빌미로 수감되었다. 조선어학회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어를 연구하는 학회였고, 수양동우회는 1926년에 안창호가 조직한 민족운동,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윤재 선생은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이내 그의 학생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책을 읽으며 독립운동가의 나라의 자주적인 독립에 관한 의지와 열망이 얼마나 거셌는지 알 수 있었던 대목이어서 인상 깊게 읽었다.

 

“우리는 지금 일본의 총칼 밑에 잠시 눌려 산다고 언제나 이럴 줄 알아서는 큰 잘못이다. 나는 나이도 들었고, 지금 형세로는 감옥에서나 죽게 생겼지만, 너히들은 대명천지 밝은 날에 내 나라 다시 찾고 독립 국민으로 떳떳이 살 날이 꼭 올 것이다. 너희들은 틀림없이 독립을 보리라. 그러자면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한다.”

 

- 민재호, 「이윤재 선생님의 조국애」, 『경신』 42, 1985

 

 이윤재 선생은 함흥형무소에서 1943년에 생을 마감했는데, 그 당시 그의 나이가 56세에 불과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바쁘게 사셨을 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누군가를 제대로 가르치려면 자신 또한 20년은 족히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도 새삼 실감이 났고, 나도 이윤재 선생처럼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에서 나왔던 일화 중 이윤재 선생이 허투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던 일화가 있었다. 바로 그가 매주 일요일마다 원고 검수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 검수조차도 간단히 하지 않고 빨간색으로 가득 찰 때까지 수정을 해주셨다고 한 일화를 보니 이윤재 선생이 아마 완벽주의자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처럼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수 있고 묵묵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또 다른 인상 깊었던 내용 중 하나는 바로 중국으로 유학을 가신 거였다. 아직 이윤재 선생이 학생이었을 적에 중국으로 유학을 가 신채호 선생을 만나 민중에 의한 자주독립이라는 큰 영향을 받았다는 대목에서 나도 한국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나라에서 공부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또 국어학자로서의 그는 거의 현대 한글의 문법을 창시한 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어근에 맞게 글을 쓴다.”라는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규칙을 만들어냈다는 게 그라는 걸 알고 나니 얼마나 한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을 분인지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던 것 같다. 이윤재 선생은 또 역사교육에도 깊숙이 손을 뻗쳤는데, 본래 그 당시 학교에서 조선의 역사의식을 일깨워줄만한 수업을 하는 건 금지되어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감시와 압박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일깨우는 수업와 강연을 다수 진행했다. 1931년 동아일보가 주최하고 조선어학회가 후원한 제1회 조선어강습회를 시작으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한 한글강연회에서는 ‘철자법에 대하여’라는 강연을, 1936년 10월 25일부터 11월 6일에는 서울 청량리 안식교 청년회 교회에서 주최한 한글강화회에 강사로 활동하였고, 1937년 1월 11일부터 16일 4일 간은 조선어학회 회관에서 한글 강습회를 진행했다. 이윤재 선생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말하면 결단코 우리나라의 최초 국어사전 편찬에 힘썼다는 것일 터다. “조선 사람에게는 조선말 사전 한 권도 없다.”라며 통탄하던 그는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에 가입하여 국어사전 편찬은 물론 잡지 《한글》에 힘을 들였다. 특히 《한글》같은 경우에는 중간에 출판비가 부족해지자 어윤재 선생이 자신이 편집한 『문예독본』의 저작권을 출판사에게 넘기기까지 했다. 당시 『문예독본』은 상, 하 권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모두 4000부 넘게 판매되어 매우 인기 있는 작품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조선어학회 회관의 경우에는 이윤재 선생 자택의 일부를 매각해 만든 것이었다. 자신의 저작권이나 자택의 토지조차도 매각해가며 독립운동에 힘썼던 이윤재 선생의 희생적인 면모가 드러났던 대목이었다. 어떻게 한 가지의 일에 몰두하여 죽음도 무릅쓴 채로 그렇게까지 이타적이고 희생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그렇게까지 했기에 이윤재 선생과 다른 독립 운동가들이 ‘위인’으로 불리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는 조선어학회 활동을 통해 1940년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개정안을 성안하여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과 충돌하여 동료 31인과 같이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은 해방 후 908쪽에 달하는 『표준 조선말 사전』과 『조선말큰사전』(1947-1957)이 만들어지는 것으로 실현되었다.

 

 보면서 조금 특이했던 점이 있다면 이윤재 선생이 기독교 신자였다는 부분이다. 그가 역사를 공부했다는 언급이 나오면서 동학을 지지했다는 부분 있었는데, 내가 알기로는 동학이 그 때 당시 서학(기독교)에 반대된 개념으로 등장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성경 번역본을 현재 맞춤법에 맞춰 우여곡절 끝에 직접 개정하기까지 한 충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가 동학을 좋게 평가했다는 점은 굉장히 의외였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선 독립운동가에 대한 존경심과 자긍심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내가 책을 읽었던 때가 광복절 하루 전날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56년 동안 오로지 한글과 한국을 위하여 이토록 많은 일을 하셨다는 게 정말 놀라웠다. 강연 부분이나 사전편찬 부분에 대해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하신 게 많아 읽으면서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 존경심과 동시에 이윤재 선생이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원인들 중 하나가 아마 환경의 특수성에 기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일단 허투루 쓸 시간도 없었을 뿐더러 일본의 민족문화말살정책은 점점 심화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국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기회도, 한글을 쓸 수 있는 기회도 없어지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그도 최선을 다해 가르쳤어야했을 것이다. 특히 교육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그로서는 가장 최우선시 되는 일이 교편에 서 자라나는 꿈나무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과 자국의 자긍심을 키워주는 일이 아니었을까. 흔히 독립영화에서 그려내는 무장독립투쟁군사가 있었다면, 그 위대한 업적들 뒤에는 우리 생활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윤재 선생의 업적처럼 또 다른 위대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독립운동가’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장독립투쟁을 많이 떠올렸는데, 이 책을 통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색안경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보다 넓은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힘써주신 분들을 독립운동가로 기억하며, 추모하고 존경할 것이다.

최근에 본 영화 중에 ‘봉오동 전투’라는 독립영화가 하나 있다. 그 영화 중에서 가장 기억에 많이 남았던 것이 한 어린 일본군 한 명을 인질로 삼고 독립운동가가 끌고 다니며 그의 가치관과 사고관을 변화시킨 것이었는데, 이를 본 뒤 이 책을 읽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만약 당시 일본 민간 시민에게도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이 침략의 부당성에 대해 ‘교육’했다면 뭐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무심코 들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현실 가능성이 0에 수렵하는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언젠가는 전 세계적으로 모두가 인류애적 사고가 기반이 되어 평화를 추구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21세기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나라에서는 분쟁과 폭력이 만연하다. 독립운동가의 평화를 향한 발걸음을 본받아 우리도 나아가야할 것이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어디든 적용이 가능한 말이지만 아마 우리 일상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사용하고 있는 언어, 행동, 그리고 자의식 자체의 특별함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모두 독립운동가의 처절한 투쟁을 거치고 나서야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말 그대로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으면 안 된다. 매일매일 사용하고 있는 우리말의 소중함을 알고,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알고, 우리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음에 대한 소중함을 알고 있어야할 것이다. 또한 이 모든 것이 선조들의 희생 없인 불가능했을 것임을 알고 있어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