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세계사-서양편」을 읽고
유시연
인류는 직립보행과 도구의 힘으로 이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며 오스트랄로피테쿠스,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순으로 발전했다. 선사시대는 크게 뗀석기를 사용하던 구석기 시대와 간석기를 사용하던 신석기 시대로 이루어지는데, 이는 인류 역사의 99% 이상을 차지한다. 구석기 시대에는 수렵과 채집을 주로 하였다. 그러다 약 1만 년 전, 농경과 목축, 즉 신석기 혁명이 나타났다. 힘든 농사일이 비교적으로 남성의 몫이 되면서 남성의 사회적 지위가 여성에 비해 높아졌다. 그들은 동물을 많이 잡을 수 있기를 기원하며 벽화를 그렸다. 선사 시대는 지금껏 역사를 배워오면서 꾸준히 듣고 학습해온 부분이다. 딱히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없었지만 인상 깊게 읽은 것은 그들의 문화였다. 인류의 문화와 예술은 그 시대 배경이 밑받침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고, 그로 인해 지금의 예술과 그 당시의 예술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꼈다. 석기 시대는 무엇보다 생존이 주가 되었으므로. 이때부터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낮았다는 것에 씁쓸했다. 여성이 투표권을 얻은 지도 정말 몇 년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글자도 남아있지 않던 시대의 일들을 어찌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추측해낼 수 있는 지에 대한 경외심도 들었다.
그리스는 에게 문명으로부터 발전했다. 에게문명은 크게 크레타(미노스) 문명과 미케네 문명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미케네 문명이 도리아인의 침략을 받고 멸망한 뒤 폴리스가 형성됐다. 그들은 자부심이 높아 스스로를 헬레네스, 국토를 헬라스, 이민족은 바르바로이라 부르며 자신들과 구분했다. 바르바로이라는 말은 원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 이라는 뜻이었지만 야만인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고 한다. 또한 폴리스는 곡물 생산이 어려운 자연환경 탓에 식민 사업을 벌였다. 이를 이용해 돈을 번 평민들이 참정권을 얻음으로써 민주 정치의 기반을 만들었다. 폴리스 중에서는 민주정치를 기반으로 발전한 아테네와, 강력한 군국주의 정책으로 발전한 스파르타가 양대 산맥이 되었다.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에서 아테네를 중심으로 뭉친 델로스 동맹이 활약함으로서 아테네의 입지가 높아졌지만 그 권력으로 다른 폴리스에 지나치게 간섭해 결국 여러 폴리스가 델로스 동맹에서 탈퇴하고는 스파르타 중심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입했다. 결국 두 동맹 간에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30년 간 이어졌지만 그 후 폴리스는 빠르게 쇠퇴하였다. 반면 그리스 북쪽에서는 마케도니아가 힘을 키우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가 특히 보병 밀집 기술을 기반으로 원정을 나가며 영토를 크게 넓혔는데, 이를 알렉산드로스 제국이라 한다. 이 때 꽃 핀 것이 바로 헬레니즘 문화이다. 폴리스 문화와는 달리 개인주의적이고 세계 시민 주의적이다. 여기서 에피쿠로스 학파와,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세계 시민 사상을 주장한 스토아학파가 등장했다. 흔히들 서양은 개인주의적이고, 동양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하는데 그게 여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특히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세계 시민 사상을 주장한 것이 놀라웠다. 21세기 현대에서 사는 우리는 아직 우리 일상 곳곳`에 위치하고 있는 각종 차별과 혐오들로 인해 골머리를 썩고 있는데 그 먼 기원전에서는 벌써 평등을 지지하던 이들이 있다는 것이 뭔가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인류가 만들어낸 것들의 발전은 분명하지만, ‘인류’ 그 자체의 발전은 과연 있었던 것일까? 오히려 지금보다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우리보다 높은 차원에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로마는 처음에는 왕정이었으나 기원전 6세기에 귀족 공화정 체제를 이루었다. 그 과정에서 평민이 점점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였고, 이는 평민 의회와 12표법, 리키니우스법 등으로 실현되었다. 공화정을 발전시킨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고, 이어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해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오랜 전쟁은 농민의 몰락을 불러 일으켰고, 지배층이 라티푼디움을 운영하며 이를 가속했다. 그 과정에서 그라쿠스 형제가 토지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했다. 실질적인 로마의 첫 황제로 여겨지는 옥티비아누스 후 로마의 평화를 얻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를 다시 발전시키려 천도 및 국교 수용 등 여러 노력을 하였지만 종내 로마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게 된다. 로마제국은 실생활과 연관된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저자는 법률을 로마가 남긴 최고의 유산이라 평했다. 이 때 로마와 같이 크리스트교가 성립되었다. ‘법’이라는 개념이 고대 로마제국으로부터 비롯됐다는 것이 놀라웠다. 로마는 그들이 만든 법에 기초에 귀족 공화정 체제를 이루었으니, 입헌 군주제가 아닌가? 그 먼 고대 로마 제국에서 벌써 입헌군주제가 나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지금 학교에서 배우고 있는 프랑스는 18세기가 돼서야 입헌군주제가 실행되었는데 말이다. 또, 로마 제국부터 국제적인 양상을 띄웠다는 것이 새로웠다. 한국의 경우에는 아주 인접한 주변 국가들과만 싸우며 영토를 지켜왔는데, 고대 로마 제국은 초기부터 대륙, 나라 단위로 영토를 넓혀갔기 때문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서양 세계사의 토대는 유럽으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지금의 유럽은 크게 게르만족과 노르만족의 이동으로 형성되었다. 이 때 특히 프랑크 왕국이 일찍부터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여 크게 부흥했고, 당시 서유럽을 지배하게 된다. 이 프랑크 왕국이 후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이 된다. 또한 바이킹족으로 묘사되는 노르만족의 이동이 바로 훗날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의 기원이 된다. 476년 게르만족에게 멸망한 서로마 제국과는 달리 1000여년 그 역사를 자랑하는 동로마 제국은 비잔티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1453년에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한다. 이는 그의 고유한 문화를 지녔는데, 수도에 위치한 성 소피아 성당이 대표적이다. 이 비잔티움 문화와 그리스 정교는 슬라브 족에게도 영향을 주었는데, 그들이 이동해 모라비아 왕국, 폴란드 왕국, 슬로베니아 왕국 등을 세웠다. 동북쪽으로 이동한 슬라브족은 훗날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지만 9세기에 러시아의 기원이 되는 키예프 공국으로 통합되었다. 이렇듯 왕국들의 존망이 하루아침에 결정되어 매우 혼란스러웠던 9세기 서유럽에는 국왕 대신 성주에게 의지하는 봉건제도가 만들어졌다. 또한 카노사의 굴욕에서 볼 수 있듯이 크리스트교의 권력이 매우 높아졌다. 이런 부패한 크리스트교를 정화하고자 수도원 운동이 일어났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런 크리스트교의 부패는 점점 심화되어 십자군 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명목상으로는 예루살렘을 되찾는다는 것이었지만 정치적인 목적이 더 강했다. 하지만 이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경제와 무역이 발달하게 되었고, 이는 봉건제도 붕괴와 길드 출현의 기반이 되었다. 덧붙여 흑사병이 창궐해 결국 장원제도는 붕괴하게 된다. 이 때 아비뇽 유수에서 알 수 있듯이 권력을 얻은 국왕과 교황의 대치가 심화되었다. 또 영국에서는 대헌장 과 의회 제도로, 프랑스에서는 영국보다 앞선 왕권 강화로 국가를 발전시켰다. 영국과 프랑스가 중앙집권적인 국가로 발전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백년 전쟁이었다. 이 때 그 유명한 잔 다르크가 활약했지만, 전후에는 마녀사냥으로 화형에 처했다. 그 후 영국에서는 장미 전쟁이 또 한 번 일어나 영주와 기사 계급이 몰락하게 되었다. 다른 쪽에선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 왕권을 강화시켰고,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에서는 지방 분권 체제를 이어갔다. 이런 중세 사회에서 교회·수도원만으로 부족해진 학문 연구 기관으로 대학이 나타났다. 크리스트교 정신이 담긴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도 나타났다. 지금까지의 서양의 세계 역사를 보면 정말 종교 때문에 비롯된 일들이 끝도 없이 있다. 종교전쟁이니, 종교로 인해 한 국가의 존폐가 결정된다느니, 교황의 권력이 실질적인 국가의 통치자인 국왕보다 높아지게 된다느니, 내게는 정말 생소한 말들이었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억압이 강하지 않기에 현실감이 없는 것일 수도 있다. 선사시대 챕터가 끝난 후에 빠짐없이 나오는 것이 바로 크리스트교인데, 과연 선함과 구원을 주장하는 그들이 저지른 일들은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일까. 아마 정당화하기에는 십자군 전쟁이나 권력남용으로 일어난 모든 폐해들이 너무 크지 않을까 싶다. 백년 전쟁에서 잔 다르크의 마녀 사냥도 안타까웠다. 되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퇴화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 대학이 이렇게 일찍부터 등장했단 사실이 놀라웠다.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의 성균관이 최초의 대학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다면 서양은 보다 옛날부터 교육이 평준화되어있다는 말인가? 기회가 된다면 청소년을 위한 세계사-동양편을 읽고 그 둘을 밴다이어그램같은 것으로 비교해보고 싶다.
이탈리아에서는 인문주의를 내세우는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 세기의 역작으로 불리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비너스의 탄생, 다비드상 등 다수의 예술작품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는 사회 개혁적 성격이 강했다. 르네상스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되었고, 개인주의·세속주의·합리주의 등 근대 의식 형성의 초석이 되었다. 또한 루터가 교회에서 성당의 증축 비용을 마련하기위해 면죄부를 판매한 것을 시작점으로 독일에서 종교 개혁을 이끌었다. 그의 종교개혁은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의에서 국가의 종교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으로써 끝났다. 개인의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것은 30년 전쟁을 끝맺은 베스트팔렌 조약이다. 그 후 루터의 뜻을 따라 칼뱅이 종교개혁을 이어갔다. 칼뱅은 예정설을 주장해 모든 시민을 구원받을 것임을 확신하고 자신의 직업을 충실하면 된다고 말했다. 부의 축적을 정당화해 근대 자본주의의 밑거름을 만든 것이다. 이렇게 유럽 곳곳에서 프로테스탄트(신교도)의 종교 개혁이 심해지자 교회에서는 반동 종교 개혁을 감행했다. 다른 한 쪽에서는 동방과의 무역을 통해 경제적 부를 얻고자 신항로 개척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가격 혁명이 일어나 영주와 기사가 대거 몰락하게 된다. 또한 상업 혁명이 일어나 시민 계급의 성장도 더욱 가속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엔 원주민 문명의 파괴가 존재하고 있다. 이런 발전들을 뒷받침으로 절대 왕정이 확립됐다. 절대주의 국가들은 상공업과 왕권신수설을 배경삼아 관료제와 상비군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는 근대적인 국가 형태가 아니라 봉건 사회부터 시민사회의 과도기다. 에스파냐(펠리페 2세), 영국(엘리자베스 1세), 프랑스(루이 14세)이 절대왕정의 예이다. 반면 동유럽에 위치해있던 러시아(표토르 대제), 오스트리아(마리아 테레지아), 프로이센(프리드리히 1·2세) 는 계몽 군주로서 군림하였다. 17세기에는 뉴턴이 대표되는 과학 혁명이 일어났다. 18세기는 ’이성의 세기‘라고 불리며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계몽사상이 유행했다. 이런 이성적 사상들로 인해 절대 왕정의 중상주의를 비판하는 중농사상이 등장했다. 자유방임적 경제 정책을 주장해 자유주의 이념의 형성에 이바지했다. 18세기 영국에서는 면직물을 기반으로 한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생산력이 눈에 띄게 발전했지만 그와 동시에 자본가와 노동자가 대립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기계 파괴 운동과 선거법 개정 운동을 벌였지만 빈부 격차 등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심각해지자 사회주의 운동이 유행하게 된다. 특히 영국에서는 의회와 국왕(찰스 1세)의 대립이 심해졌는데, 이는 권리 청원과 권리 장전 등의 활약으로 의회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를 청교도 혁명이라 한다. 하지만 이로 만들어진 공화정은 이름뿐이었고, 실질적으로는 크롬웰의 독재였다. 결국 청교도의 금욕적 정치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이에 찰스 2세가 왕으로 추대되어 왕정으로 되돌아갔다. 그 후 제임스 2세가 가톨릭교도를 관리로 뽑으며 전제 정치를 펼치자, 보수·진보당이 연합해 신교도인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를 공동 왕으로 추대했다. 이런 명예혁명 이후 영국은 입헌 군주제로 바뀌었다. 반면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영국에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아메리카에 인지세를 부과하자 식민지 주민들이 영국 상품 불매 운동을 벌였다. 허나 돌아온 영국정부의 오만한 답이 그들을 자극해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났다. 본격적인 미국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주민들의 사기는 꺾여있었다. 이를 뒤엎은 것이 패트릭 헨리의 연설과 토마스 제퍼슨의 독립 선언서였다. 결국 영국은 1783년에 파리 평화 조약을 맺었다. 또, 이런 미국 혁명과 계몽사상에 영향을 받아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 국민의회, 입법의회, 국민 공회를 거쳐 루이 16세와 로베스피에르까지 처형당하자, 나폴레옹이 보수파와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차지했다. 이후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했지만 나폴레옹은 정복자로 변모했고, 그에 유배까지 당하며 쇠퇴한다. 저자는 나폴레옹을 혁명의 성과를 부르주아 계급에게 가져다 준 혁명의 찬탈자이자 군사 독재자라고 평가한다. 그 후 20여 개 나라가 연합해 빈 체제를 구축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7월·2월 혁명으로 빈 체제는 완전히 몰락했고, 프랑스는 2월 혁명 이후 공화정임을 선언하였다. 프랑스에 이어 영국, 이탈리아 등 다수의 나라가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실현하였다. 근대사회에서는 많은 혁명들과 동시에 빠른 발전이 이루어졌다. 개인적으로는 교과서에서 얕게 훑었던 미국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이면에 대해서 잘 알 수 있어서 제일 흥미롭게 읽었던 파트이다. 특히 나폴레옹이 보수파와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가 혁명을 부르주아의 손으로 넘겨준 자라고 묘사한 것이 인상 깊었다. 심지어 옛날에 나폴레옹 뮤지컬을 본 기억이 있는데, 거기서도 나폴레옹 시점으로 돌아가니 나폴레옹이 좋은 일을 한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다. 헌데 이렇게 책을 통해 나폴레옹이 한 일을 객관적으로 알게 되니 미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작가가 나폴레옹에 대해 내린 평가가 인상 깊었다. 흔히들 언론에서 나폴레옹을 혁명의 아들이라 묘사하는데, 작가는 나폴레옹을 혁명의 결과를 부르주아에게 물어다준 혁명의 찬탈자라 묘사했다. 그 부분에서 내가 지금껏 나폴레옹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그가 무조건 나쁜 사람이지만은 않겠지만 말이다. 적어도 나는 최상위 계층은 아니다보니 노동자와 시민 계급에 이입해서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 노력해도 어느새 보면 그들의 심정에 이입해서 쳐다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일반 시민)의 참정권이 확립된 지 단 몇 세기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일찍이 참정권을 확립하고 있었으므로. 또,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았던 미국혁명과 그 배경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미국혁명은 지금껏 내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알게 해주었다. 미국이 과거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기억이 있다고만 알고 있지, 그 배경이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단 하나도 몰랐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독립운동 총 사령관이었던 것도 몰랐다……. 물론 교과서에서도 프랑스 혁명을 배우며 그 배경에 계몽사상과 미국혁명이 있다고는 한 줄로 설명이 되어 있다. 하지만 책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묘사해주는 건 아닌 것 같다. 내 지식의 폭을 넓힐 수 있어서 내 스스로도 읽으면서 쉽게 집중할 수 있었다. 사실 공부를 하면서도 프랑스 혁명의 전개 과정이 왔다 갔다 해서 어쩌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책에서 한 번에 나열하며 정리해주니 이해가 빨랐다. 세밀하게 하나하나 짚어가며 공부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지금 당장 나에게 필요한 건 중요 사건들을 겉으로 하나씩 짚어가며 시대의 흐름을 파안하는 일 같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미국혁명과 그들이 발표한 ’먼로 독트린‘이라는 것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다. 책 읽다보니 이 ’독트린‘이라는 단어가 몇 번 나왔다. 앞의 ’먼로‘와 같은 것들은 그 걸 발표한 사람의 이름인가? 독트린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현대 사회는 공황이 일어나 식민지를 필요하게 돼 제국주의 시대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시작된다. 영국, 러시아와,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의 강국들이 아프리카, 아시아 등을 식민지로 삼았다. 한 편 독일을 통일한 비스마르크는 제국의 안정적인 발전을 위해 유럽 대륙의 평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와 삼국 동맹을 맺었다. 이후 비스마르크가 물러나고 빌헬름 2세가 전면전에 나서며 팽창 정책을 펼쳤다. 이 정책이 영국의 해상권을 위협했고, 결국 영국이 독일의 삼국 동맹에 대항해 프랑스, 러시아와 삼국 연합을 만들었다. 발칸 전쟁으로 대륙 전쟁 가능성이 심화된 가운데, 사라예보 사건이 끝내 제1차 세계 대전의 막을 열었다. 중립을 유지하던 여러 국가들이 연합을 지지해 승리는 연합의 손으로 돌아갔다. 독일 및 패전국들은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는 노동자 계급이 세운 정부의 공산주의 국가로 탈바꿈했다. 이 사회주의 혁명은 다른 나라들로 퍼져 나갔다. 다른 한 쪽에선 경제 대공황이 일어났다. 선진국인 미국에 경제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자본주의 국가들이 경제 불황에 빠졌다. 허나 미국은 뉴딜정책을, 영국은 자유 무역주의 원칙을 수정해 수년 안에 공황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독일, 일본 등의 후발국들은 대외 침략을 통해 공황을 해결하려 했다. 이탈리아에는 파시즘 체제가, 독일에서는 나치즘 체제가, 일본에는 강력한 군국주의 체제가 등장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국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참전국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서로 강화를 맺었고, 국제 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국제 연합(UN)과 같은 조직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평화도 잠시, 다시 자본주의 국가의 대표인 미국과 공산주의 국가의 대표인 소련의 냉전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겠다며 제 3 세계 선언을 하며 독립운동을 실행했다. 소련의 스탈린이 죽자 미국과 소련의 냉전의 분위기가 사그라들었다. 여러 공산주의 국가들이 무너지고 자본주의 국가로 탈바꿈하며 지금의 현대까지 오게 되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류의 역사를 가장 처음부터 지금까지 고작 몇 시간 만에 훑어볼 수 있게 한 이 책에 감사한다. 1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역사를 배우고 공부하며 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뒤엉켜져 있었던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엉켜버리겠지만 적어도 전과 같진 않을 것 같다. 또, 오래된 인간찬가나 서사시를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역경과 고난이 있었지만 그를 이겨내고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까지 도달했고, 전쟁이라곤 우리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고대국가인 아테네나 로마의 평화 시대와 같은 평화를 되찾기까지 몇 천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 몇 세기라는 시간동안 우리는 분명히 발전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번 현대 파트는 근대 파트 이후로 가장 재미있어 집중해서 읽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나고 수많은 노력 끝에 이 자리에까지 오게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천 년 간 지속되던 인종차별과 성차별들은 (그나마) 조금씩 해결되고 있는 것 같다. 오바마 정부나 넬슨 만델라 정부를 보면 인종차별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은 지당한 사실이다. 인간은 어리석게도 똑같은 실수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랬던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평소에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강하게 생각이 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도대체 몇 번이나 왕정, 공화정, 입헌 군주정을 반복하는지. 물론 생각해보면 이는 각 신분에 따른 입장 차이이기도 하다. 그렇게까지 필수적으로 필요하지도 않은 이익이 중요한 것일까? 그들은 일단 무엇보다 박애주의 정신이 필요하다. 경제회복을 위해 남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 이득을 얻는 데에는 누군가의 희생이 항상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항상 잊지 않아야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비록 그 참혹한 현장을 단 몇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으로 간결하게 묘사했지만, 그 문장 속에 숨겨진 그 많은 사람들의 무게를 항상 생각해야한다고 느꼈다. 우리와 내가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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